2017년 10월 24일의 화요일, 오후 4:02분, 사무실.

마음이가 오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내가 육아휴직만을 바라보고 살지 않았더라면, 요즘 만큼 막장에 치닫는 이 썩은 조직을 보고 나는 어떠한 분노, 어떠한 절망을 느꼈을까. 눈 질끈 감고 모른 척을 했을까. 아님, 사표를 던졌을까. 선배의 그릇된 조언으로 곤란한 처지에 놓여 곧 등이 터지고야 만 사회초년생 꼬꼬마를 보다 못해 내가 대신 사과를 했더랬다. 선배들이 그 모양이라, 상사라고 있는 인간들이 그 모양이라, 너보다 더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고 혜안이 넓어야 할 어른들이 그 모양이라, 내가 대신 미안하다고. 더불어 사는 사회라고 배우며 자랐을테지만, 사회는 결코 녹록치 않다. 태어날 마음이에게는 그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내라고 알려줘야 할까. 부모로서의 막연한 두려움.

내 염려와는 달리 아직 엄마의 뱃속 밖을 경험해 보지 못한 마음이는 천진난만하다. 꿈틀 꿈틀 태동이 느껴질 때면 없던 모성애가 생겼다가도, 지나간 줄만 알았던 입덧이 이따금 ‘안녕하신가’ 안부를 물을 때면, 임신 만큼 어려운 길도 세상에 없을 것만 같다. 그리고, 남편만한 사람도 이 세상에 없다는 것도 같이 깨닫는다.

마음아, 너와 엄마를 향한 네 아빠의 사랑은. 그 깊이를 우리가 감히 가늠할 수 없을거야.

임신의 반을 넘어왔다. 다소 늦었지만, 내일이면 마음이의 성별도 알게 되겠지. 사실 아직도 엄마는 궁금속에 살고 싶긴 해. 네가 딸인지, 아들인지, 아빠와 티격태격하며 오가는 농담거리도 꽤나 큰 즐거움이었거든. 이러나 저러나 넌 엄마와 아빠가 다시 만나 사랑한 결실이고 기적이야. 그러니 그 무엇보다도 건강하게 태어났으면 해.

오늘도 엄마는 생각이 많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 마음이가 경험해야 할 세상에 관해, 우리 가족을 지켜야 할 아빠의 노고에 관해. 그래도 분명한 건, 네가 와줘서 다행이라는거야.

이런 저런 하루. 해마다 글감이 끊이지 않았던 짙은 가을. 몽피마 멤버들과 민둥산으로, 둔내로, 강화도로, 산정호수로, 고석정으로, 떠나던 숱한 가을들. 이젠 각자 엄마의 길을 걷느라 여행길을 나서지도, 삶에 치여 세련된 포장으로 예쁜 글을 써내지는 못 하더라도. 그 때의 추억으로 또 단출한 오늘의 기록으로 언젠가는 웃고 말겠지.

웃어야지 어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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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t Check.

국방백서는 2004년부터 주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국방부 관계자는 ‘주적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북한 정권을 적으로 규정한 것만으로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표현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가장 최근에 발간한 국방백서 제2절 1항 국방목표에는 북한이 아닌 ‘북한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북한 주민과 명백히 분리한 것이다.

사실 적이든 주적이든 말장난일 뿐이고, 중요한 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는 것이다.

어느 기사의 덧글이 와닿아서:

입대 전 신체검사를 받으면서도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다’라는 말이다. 훈련소에서도 정신교육시간에도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다.’ 이런 교육이 극우의 시작이며 악의 평범성을 자아낸다. 나치의 주적은 유대인이었고 그들은 수 없이 학살당했다. 우리는 그런 나치가 나쁘다고 배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전체주의적 사고를 세뇌당한다. 과연 이 것이 바람직 한가.

논리적 비논리.

난 세월호 사건에 대해 진심으로 가슴 아프다. 내 조카나 사촌동생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난 지금 청와대에 폭탄을 들고가 다 죽이고 나도 죽었을 거다. 하지만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거나 노란 팔찌를 착용하진 않는다. 그런 걸 하지 않아도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있고, 반드시 그런 걸 착용해야만 그 아이들을 기억하는 건 아니다.

난 광화문에 나가지 않았다. 광화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해서 광화문에 나간 사람들 만큼 이 상황이, 이 나라가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다. 반드시 광화문에 나가야만 의식있는 국민이고, 그렇지 않은 국민은 나중에 할 말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한국 사람들의 이분법적 태도는 늘 커다란 사건이 일어날 때 발현된다. 적 아니면 동지. 나쁜 놈 아니면 좋은 사람. 참 아니면 거짓. 적이었던 사람이 동지가 되는 순간이 있고, 나쁜 놈이었던 사람을 역사적으로 따지고 보니 착한 사람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감히 참과 거짓을 누가 가려낸단 말인가.

나와 함께하면 내 편이고, 나와 함께하지 않으면 남의 편이라는 생각. 최소한 민주주의 국가라 불리고 있는 곳에서 살고 있다면 그 생각부터 버려야 하지 않을까. 답답하다.

2016년 5월 7일의 금요일, 새벽 2:01분, 서재.

이제는 무거운 만남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벼운 것을 나 역시 지양한다는 사실이
내가 그럴 나이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흔한 인연에 지쳐서인지

노곤한 오후에 손만 잡고 있어도
적당한 온도로 숨쉴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당신이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은.

반주에 2차가 이어지고,
바람이 부는데 몸은 피곤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마음도 막 허하려고 해서
웃긴 생각만 잔뜩 끌어올리는 중.

좋아하는 노래의 찌질한 가사. 옳지 않아.
이런 찌질한 가사 옳지 않다면서
노래를 더 크게 틀고 결국엔 따라 부르는 나는 뭘까.

가벼워져가는 맥주캔이 아쉬워.
나를 다스리는 일이 좀 쉬워졌으면 좋겠다.

잎을 버릴 계획을 세운다.

‘사람 마음 뒤돌아서기 참 어려운 일이구나,’ 하다가도 또 어느 순간 ‘사람 마음이란 한번에 바뀌는구나’ 싶다. 나 없으면 죽겠다던 사람도 하루 아침에 내 눈이 어디 붙어 있는지 기억을 못하고, 어제까지 죽도록 싫었던 사람도 다시 보니 그럴 수 있고. 모두 일관성이 없다. 2011년 6월 28일 쯤, 뭐 그 쯤의 과거. 모든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진심으로 행복했던 며칠. 나른해서 이대로 죽어도 억울하지 않겠다, 했던 어떤 주말. 가물가물 하더니 서서히 그리고 기꺼이 사라진다.

떠나고 싶은 마음에 들어간 여행전문 사이트에서 너무 가고 싶은 패키지를 발견하지만 웬만한 9박 10일 크루즈보다 비싸다. ‘이걸 가 말아?’ 며칠을 고민한다. 이번 달 예약 현황을 매일 체크하고, 과감하게 지를 자신도 없으면서 아직 자리가 비어있으면 안심한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선택 장애, 결정 장애. 여행 가고 싶다. 출장 말고, 관광 말고, 휴양 말고, 그냥 도착한 동네를 산책하는 것 쯤으로. 조금 걷다 아무데나 들어가 우동 한 그릇, 또는 시원한 맥주 한 잔, 여유있다 못해 한가로운. 그리고 이해라는 것 조차 필요없이, 내 페이스가 자연스럽게 본인의 그리고 우리의 페이스가 되는 그런 딱 맞는 동행 한 명. 몇 시간 동안 말 한마디 주고 받지 않아도, 조급해 하지 않을 사이. 다녀온지 얼마나 됬다고 여행에 이토록 목이 마르다니, 정리하고 생각할 일들이 많은가보다.

너무 갖고 싶은데, 가졌다가 실상 그게 아무것도 아닐까봐, 실망하고 후회할까봐 두려워서 못하는 일들이 있다. 결혼이 그랬다. 그리고 내 꿈이 그랬다. 그래서 결혼을 위한 준비도, 내 꿈을 향한 실천도 하는 둥 마는 둥 10년이 지났다. 그리고. 견딜 수 없이 설레게 하는 여자, 미치도록 갖고 싶게 만드는 여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상 나도 가져보면 아무것도 아닌가, 뭐 그런 생각. 자존감 회복해야 하는데, 도대체 요즘 왜 이러지. 나는 아직 한참 예쁠 나이. 마음을 쓰러내려가며 여기 저기서 주워 읽는다.

“나는 빈 들녁에 피어 오르는 저녁 연기, 갈길 가로 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 번 빠져 다시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 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갔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 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 만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 못 하였으므로. ㅡ류근”

일에 관한 생각이 아니라면 대부분 살아오면서 주고 받은 상처에 있어 나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앞으로 만나고 살아질 그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고, 되어야 할 것인가의 다짐이다. 서른둘의 끝자락에서야 욕심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니. 왜 진작에 그러지 못 했을까, 어리석다. 어느새 나는 표독스럽고, 이기적이고, 허세로 몸을 돌돌 감은 몹쓸 인간이 되버렸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여기서 나를 포기할 수가 없다. 30년을 제멋대로 살아와서, 그리고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아서, 어려울 거라는 말은 틀렸다. 계절처럼 변하는 나다. 돌아보면 늘 그래왔다. 벚꽃이 만개한 날 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나는 싱그러운 봄이었고, 수줍게 얼굴을 내미는 여린 꽃 봉우리 같았으리라. 그리고 어느 두어 달의 나는 누군가에게 들끓는 여름이었다. 억지스러웠고, 의심에 눈이 멀어 아무도 온전히 믿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가을. 집어 든 책에서 읽은 시 한 구절처럼 잎을 버릴 계획을 세웠다.

“나무의 겨울나기는 비축하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 단풍을 징표로 내세워 나무는 혹독한 시기 앞에서 자기선언을 한다 […] 살아남기 위해 버린다는 것은 곧 아름다워지는 것임을 […]”

긴 겨울을 앞두고 나를 완전히 내려놓을 준비를 해본다. 될까? 응, 될 것 같다.

행복한 상상을 한다. 늘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나를 그가 찾아온다. 그가 기다리고 있을 대문 앞으로 곧장 나가지 않고, 주차장 지하 길로 돌아 나간다. 그와 마주하며 걸어갈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책에서 나오는 문지방 영역과 같다.

“아이가 크리스마스 양말 속에 손을 넣는 순간부터 양말 속 선물을 만지게 되는 순간까지. 먹장구름이 우리 머리맡에 잔뜩 운집해 있는 순간에서부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순간까지. 당신이 나에게 오기로 한 그날로부터 당신이 나에게 도착하게 되는 순간까지. 이 사이들 […]  이 짧은 순간에 농축돼 있을 설렘과 긴장과 예감과 떨림.”

아무쪼록 상상 속의 그는 내가 아는 그다. 태연한 척, 남자다운 척.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멋쩍은 느낌으로, 약간 어색해 하며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신나게 뛰어가다 그가 나를 발견하는 순간 나는 발걸음을 잠시 멈출 것이다. ‘그 쪽으로 갈게,’ 허락을 받고 싶다. 허락을 해주면 다시 뛰어가야지. 그리고 그의 앞에 서서 한 번 더 허락을 받아야지. ‘안겨도 돼?’ 나는 내내 웃을 것이고, 싱그러운 봄을 기억한 그는 잎을 버릴 계획을 세우는 겨울의 나를 여전히 애틋하게 여겨주리라.

하지만 이런 행복한 상상은 여러 순간 바뀌며 나를 들었다 놨다 한다. 결국 오래 잠을 청하지 못하고 다시 책을 집어 든다. 불을 켜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새벽은 바짝 다가왔다. 하룻밤의 결과는 대단하다. 얼마나 오래 갈 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산 속에서 몇 해 동안 수행하다 내려온 사람과 감히 견줄 마음가짐이다. 나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이라 이렇게 아프고 어렵구나. 누구는 ‘네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표현했지만, 내 몹쓸 성격이, 내 슬픈 천성이, 점점 나를 놓아주고 있다. 나는 더욱 잠잠해지고, 잠잠해진 나는 더 강해지고. 비로써 성장하고 있는 것. 내가 나를 죽일 것 같지 않다, 이제. 읽던 책에 적는다. ‘당신에게 집이 되고 싶다. 비로소 나를 찾았을 때, 평온함이고 안락함이고 싶다.’ 정말, 누군가에게 그래주고 싶다.

시가 끊임없이 먹힌다. 공감이 가는 문구에, 위안이 되는 말에, 밑줄을 두 번 세 번 긋고, 단어를 동그라미로 감싼다. 헛헛하다. 그리고 내가 쓰지 못한 글들을 다른 누군가 써줘서 읽을 수 있게 해준 것 만으로도 감격스럽다.

모든 시인에게 찬사를.

금새 추워진 아침이고, 잎을 버린 나는 단단하고 가볍다. 이제 내가 누군가에게 보답할 시간 같다.

2015년 11월 21일의 토요일, 오후 5:27분, 서재.

취한 어제의 실수들을 여기저기서 주워 담고, 늦은 오후 서재에 들어와 나를 철저히 혼자 둔다. 오늘은 그래야지, 마음을 먹는다. 계절에 걸맞는 건조한 시간들이 지나간다. 독설은 녹고 허기는 멈춘다. 끊임없이 글이 읽힌다. 나도 이렇게 쓰고 싶다, 한다. 더 살아 봐야겠다, 싶다.

스르르 잠이 든다. 꿈을 꾼다. 겨울 바다에 앉았다. 생굴과 살아서 끈적이는 낙지 한접시, 낮술. 바람이 불어 파라솔이 날아가고 소주잔이 떨어진다. 난로 앞에 삼삼오오. 컵라면을 후루룩 마시며 누구네 남편을 흉보기도 하고 앞다투어 딸자랑을 하기도 한다. 산다는 이야기가 이렇게 재밌다. 드문드문 오가는 연인들 때문에 해삼을 잘라내는 손이 바쁘다. 이 추운 날, 왜 우린 이 곳에 앉았느냐 실소를 터뜨린다. 바람이 불어 손을 비비며 돌아온다. 눈을 떠서는, 꿈 이야기를 해주고, 꿈에서도 술이냐 잔소리를 듣는다. 아니, 그 보다 사람. 사람과 닿아있는 시간이 좋다. 그래서 꿈에서도 그렇게 사람을 만나나, 싶다.

간만에 약속 없는 토요일 오후, 적당한 어둑함. 월요일이 되면 꿈만 같을 되새기기도 아깝고 고운 시간. 각자의 자리에서. 어제 마신 술로 병이 나있을 사람과, 여행을 하고 있을 사람. 한참 자고 있을 사람과, 나와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사람. 그리고 TV앞에서 남편과 노곤한 주말을 보내고 있을 이를 생각하며 보낸다.

비가 왔으면 비가 왔다고,

그 분께서는 비가 왔으면 비가 왔다고 쓰고,
라면을 먹었으면 라면을 먹었다고 쓰는 것이
후에 보면 고마운 기록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기록했지.

아프면 아프다고 썼고,
절대 잊지 않겠다는 나쁜 말들을 골라서

이제라도 다시,
김치말이밥이라든지 멸치국수 같은 이야기를 써야지.
맑은 날, 꽃이 핀 이야기라든지
돌아 돌아 오래 걸어간 귀갓길이라던지
초대받은 동네,
5분만에 끝난 집앞 산책 같은.
정신 놓고 잃어버려 벌어진 이불 발길질이라도.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기록.
후에 보면 나에게 고마울 걸.

서울에 첫 눈이래. 보지는 못 했지만.
웃자. 웃어.

2015년 11월 13일의 금요일, 오후 7:19분, 사무실.

이현호, 박준 시인 등 몇몇 그리그리 인터뷰에서 언제 가장 잘 써지냐는 질문. 다들 그 또래의 또래. 결론은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려가기 때문에 이별하고서가 그래도 가장 잘 써진다고. 헤어지면 아름다운 카피 같은 건 더 써지지 않지만, 시는 또 다르겠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나의 지금이 불안하고, 글도 잘 써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뭘 쓰려고 이별할 수는 없는 노릇. 담담하면 담담한대로 살아가야 하는데, 불안증과 더불어 무능해진다. 밑바닥은 너무 힘들어서 못 쓴대고, 수면으로 조금만 올라와도 아무 생각도 안 든다니.

여전히 주중이 되면 일 하느라 정신이 반쯤 나가있고, 혀 안쪽으로는 하얀 구멍이 생겨 마취한 기분으로 내내 아픈데. 저녁 내내 비가 온다고.

이 불안증에 주인이 없었으면,
좋겠다.

The Things We Think About Before We Fall Asleep (Work in Progress)

Last night, as I lay in bed, I realized that the word concision is a lesser-known synonym for conciseness, but much better. Concision contains nine letters, conciseness eleven. Therefore, concision contains more conciseness than conciseness concision. This fact is even more amazing because to be concise is to be economical, to cut the fat, to be somehow less. Concision, therefore, contains a greater quantity of the quality of being less than conciseness does.

After I figured all that out, I pushed my pillow aside and flopped over onto my belly. This is my favorite sleeping position. I rolled my eyes upward and saw the light from my digital clock glow over my knuckles. This image has been prevalent in my life; I see it on a nightly basis, just before I fall asleep. Over the years it’s been painted into my memory, so now, closing my eyes, I can see the fingers of my left hand curled lifelessly over the top edge of my mattress, weak green light making my flesh look yellow.

Over the past few years, as I’ve tried more and more to become a writer, a recurring theme in my writing has been sleep. I love to describe the way my characters sleep, what it feels like to be them, drifting off before or after the one day of their lives that I, the writer, felt compelled to document. Does my character drop like a stone into unconsciousness? Does she move through dreamscapes like a benevolent ghost? Does he doze off piece by piece, first his arms and legs, then his torso and face, and finally his mind? Does she bundle up in blankets and quilts? Does he sprawl out naked and uncovered?

I can only explain my fixation thus: I’m obsessed with sleep—too little of it and the world feels a total waste; too much and I feel a total waste. With just the right amount, there is harmony. Temporally, I divide my mind into segments of sleep. On those rare occasions when I have to stay up all night, when dawn comes I don’t count it a new day. And when I indulge in a mid-afternoon nap, I awake to a new day, one that just happens to be already nearing dinnertime.

The more I think about it, the more amazed I am by how many artists are concerned with sleep. I just searched the music library on my computer. Only 13 of the 3,812 songs I listen to regularly contain the word “sleep” in the title. But they represent almost every genre of music I can think of. From Outkast to Lisa Loeb, The Beatles to Fiona Apple, and to Radiohead, everyone cares about sleep. Everyone recognizes what a miraculous, mysterious process it is. Sleep is artful. 

But to get back to my point: I don’t care so much, right now, about the process, function, or peculiarities of sleep. I’m interested in those quiet minutes before sleep. I’m interested in the theatricalities of the mind. I know I’m not the only one who reviews the day in miniature, picks one tiny moment or event out of thousands, and stews. I re-write the moment over and over, like a deranged screenwriter. I entertain outlandish notions of running away, pumping the pedals of my bike, moving from town to town, touring the world at a grassroots level. This will probably be as close as I ever get to leading a double-life.

Sometimes it’s different, though. More often than not, I’m so enervated by the tasks of the day that I crawl up into my lofted bed and collapse like a big hulking robot whose connective bolts have just disappeared. Crash! Or I experience the other extreme: My brain is surging with ideas—almost never good ones—that it insists on entertaining for hours before it will quiet down. Scenarios, ideas, concepts, memory re-writes, new ways to do things. I feel incurably restless. Someone (Mark Twain?) once said, show me a man who has ceased to be restless and I’ll show you a failure. I don’t think Mark Twain would have used the word “cease.” But I don’t know that I’ve remembered the quotation perfectly. In any case, the point of it is that complacency is a personal death. The successful never stop striving, never feel that their work is done, and are never satisfied.

But I’ve also heard this: “Live every day such that you welcome sleep, so that at the end of your life, you will welcome death.” I adore the morbidity of that sentiment. It has, in essence, the same message as that saccharine old crap “Live each day to the fullest!” but it puts it into simpler terms. When have I lived a day “to the fullest”? Beats the hell out of me. But I do know, quite well, what it means to live a day so thoroughly, so energetically, with so much passion, vigor, drive, anger, lust, longing, and work that when my head finally hits the pillow I think about what a great break it would be to just expire halfway through the night. Except I don’t ever really get that far in the thought; it’s more like: “What a fucking day! I’m so tired. What a great break it would be to just expire halfway… [INTERNAL MONOLOGUE INTERRUPTED BY UNCONSCIOUSNESS].”

Anyway, Mark Twain (or somebody) says that restlessness is a sign of eagerness, and eagerness is a symptom of initiative, and initiative drives the successful. But on the other hand, if I somehow end the day with enough energy left over to ponder away half the night, then how hard could I have possibly worked that day? And isn’t work the root of success?

INCOMPLETE THOUGHT.

Mom prays nightly, but not in the way we usually think of prayer. No kneeling, no hands clasped, not necessarily suppliant before God. “Every time you imagine what you want for your life,” she once told me, “that’s prayer. When you wish for good things for your loved ones. When you want the universe to provide for you. Just the thought of it sends your desires out into the reaches of the universe, where they will be responded to. I usually do it before I fall asleep, when I’m awake in bed and thinking about things.”

I do not share that personal philosophy. But it works for Mom, and it helps her make sense of the many things that run through her mind before she falls asleep, of the countless thoughts that have emanated from her head and out into the universe in her 55 years of life.

THIS ESSAY IS INCOMPLETE. I WILL FINISH MY THOUGHT LATER.

All broken, vague and desultory, incomplete, utterly incomprehensible, almost like non-sense mumbled through the loose lips of sleep talk.

꿈을 수정하라?

기윤을 만나 술을 마셨다. 이미 알딸딸하다.

– 기윤. 내 꿈은 이제 없어지는 건가.

= 영화에서 그러잖아. 야구선수가 되고 싶은데 못되면 꿈을 수정하면 된다고. 주인공은 야구선수 말고 심판이 됐어. 심판이 돼서 경기를 지배하는거야. 너는 남의 글을 지배할 수 있는 에디터가 되면 돼. 더 잘 어울리고 가치있는 일이야.

– 그럼 내 결핍은 어쩌고? 평생 창작을 동경하고 살아?

나는 또 결핍 타령을 했다. 그리고 두 병을 더 마셨다.

꿈을 수정하라?

다음날 고민했다. 꿈을 수정할 수도 있어? 심판이 되면 야구선수가 되지 않아도 평생 그라운드에 있을 수 있어?

응. 그럴 수도 있겠다. 누구에게나 결핍이라는 건 있으니까. 글을 맘껏 쓰게 되면 음악을 하지 못한게, 또는 돈을 더 벌지 못한 게 결핍으로 남을 수도. 라고 혼자 위로했다.

하지만 매번. 왜 글을 안쓰냐는 질문은 나에게 반갑지 않다. 이미 결핍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동 질문에 이제 8년이 넘은 졸업 작품집을 꺼내 읽고 오그라들어 다 찢을 뻔 했다. 문장의 군더더기만 오천개 발견. 이런 주제에 무슨 작품을 쓰냐고.

그새 자랐구나. 수정도 발견할 줄 알고. 이렇게 또 어떻해서든 긍정 심리학 발휘.

하루하루 멀어질 수록 글을 쓰는 일이 무서워졌다. 그런데 나중에 정말 글을 못 쓰고 회피할까봐, 후회하고 결핍으로 남아 나를 죽을 때까지 찌를까봐.

불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