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만에, 1년 전.

한번은 스쳤을, 지나가고 말았을
빌딩 숲에서, 빗물 아래서, 어느 소박한 식당문으로
우리는 몰랐지만 아주 모르지는 않았을
이 것을 운명이라고 부르면 너무 단순하진 않은지

흐릿한 기억 중 당신 목에 있던 점이
셔츠의 옷 먼지가
말 도중 떨어뜨린 자음 하나가
정신없이 훑고 지나갔을 복잡한 도시에서

손에 겨우 잡히는 간절한 모든 것들
그 중에서도 온전히 당신 것인 적이 없던 나
그런 나를 애써 잊었더라도
잠시였던 그 시간을 기억하며

사랑을 사랑으로 갚을 시간은 있어야죠
그 여름을 갚을 가을을, 겨울을, 봄을 내게 달라고
두렵지만 단호한 마음 당신께 건내보며

“오빠, 그 동안 잘 지냈어요?
우리 이제 헤어지지 말고, 평생 같이 살아요.”

관찰하다.

고등학교 내내 한 명의 남자친구. 꽤 긴 시간 그를 보며 지냈다. 어느 날 기숙사 창문으로 내다본 저 아래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남학생들이 점처럼 작게 보였였다. 그 중에 내 남자친구가 누구인지 한 번에 알아보는 신공이 생겼다. 내가 그를 오래 관찰해 왔기 때문일 거다.

효림언니가 흰콩이를 낳았을 때 조리원을 방문한 나는, 늘 뱃속에서만 내 목소리를 들었을 흰콩이와의 첫 대면이 경이로워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순간 눈물이 왈칵했던 이유는 고작 한 시간만 이렇게 바라봐도 눈이며 코며 입이며 이마까지도 눈에 익숙해지는데,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를 한 달을 몇 년을 바라보는 내 아이는 대체 어떤 존재일까, 하는 애잔함 때문이었다. 그렇게 관찰이라는 게 무섭고도 중요한 것이리라.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첫 번째는 관찰이다. 일상을 관찰하고 발견하는 것. 그 것이 인사이트와 연결된다. 그래서일까, 힐러리 교수는 내 글에 막힘이 느껴질 때마다 오늘은 수업에 오지 말고 카페에 앉아서 하루 종일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라고 풀어주었다. 그 때 지켜봤던 몇 명의 특이한, 혹은 유난히 마음에 와닿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얼굴이며 표정이며 섬세한 손짓까지 기억이 난다. 자욱한 세월만큼이나 낡은 책 속, 여사님 사진을 책갈피로 쓰고 계신 할아버지라던지. 나 처럼 몇 시간 동안 깜빡이는 커서만 들여다보고 있던 고뇌의 글쟁이라던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작은 행동, 소소한 습관들.

비록 좋은 글을 쓰고 있지는 못하지만 내가 가장 열심히 관찰하는 것은 나 스스로다. 지금 내 감정의 기복들, 우울이 어느 지점에 와있는지, 하루에 몇 보를 걸었는지, 최근 밥과 면의 비율이 어느 정돈지, 알러지는 어떤 이유로 발병하는지, 타인에 대한 내 잣대가 어디쯤인지,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지, 미움은 또 어디에 두었는지. 매일 관찰하고 살핀다. 그래서 나에 대한 글은 잘 쓸 수 있다.

작년 혼인신고를 하면서 그의 이름을 한자로 그려적고, 생년월일을 쓰고, 마음이 뭉클해졌었다. 이제 나 말고도 박승환이라는 사람을 관찰하게 되었구나. 늘 소파에서 잠들고, 뭔가에 집중 했을 때의 표정, 유난히 즐겨입는 옷, 싫어하는 사람, 몸 어디에 점이 있는지, 상처가 있는지, 어디가 아픈지, 또 어디가 예쁜지.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관찰하다 보면 그에 대한 글도 잘 쓸 수 있겠지.

귀 뒤로 이어지는 목선을 엄지로 어루만지며 이렇게나 가까워진 그와 내가 놀랍다. ‘여길 이렇게 쓰다듬을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세상 나 하나 뿐이겠지.’ 유독 특별한 이 특별함. 무엇보다 내가 전혀 모르고 살 수도 있었을 이 감정들을 겪고 느낄 수 있게 되어 고맙다. 나날이 겸손해지며 사소한 것에도 무척이나 감사하다. 매일 매일 본질에 가까운 사랑을 알아가며, 이제서야. 정말 지금에서야, 비로소 행복한가, 싶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는 중이라면 이 행복이 당신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길 바란다.

결혼은 다행이다.

스물 여덞의 나는 이런 글을 썼다.

“누군가는 집에 바래다 주기 귀찮아서 결혼을 했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결혼을 하니 여행 파트너가 늘 같은 사람이라 고민을 안해 편하다고.

결혼을 하면 헤어지지 않고, 다른 곳에서 잠들지 않고 휑하게 혼자인 기분 없이, 평생을 같이 있을 수 있는건가. 정말 신기하게도 그게 보장이 된단 얘긴가. 어렸을 때부터 잠자리가 예민해서 엄마가 재워놓고 나가는 즉시 다시 울기 시작했다는데, 세살때의 그 버릇은 역시 어디 안가더라. 스무살이 되던 무렵. 내 방에서 나 혼자 잠드는 일이 무시무시하게 끔찍한 날이 자주 있었다. 평생 같은 자리에 타인과 누워 잠들면, 적어도 혼자는 아니니까. 그럼 세살 버릇도. 그리고 스무살 그 때의 공포도 해결이될까.

결혼, 왜 자꾸 주위에서 하라고 하는거지? 잠 푹 잘 수 있는, 외롭지 않은, 이런 상투적인거 말고 나 처럼 세속적인 여자에게 결혼이라는 것의 ‘투자가치’ 를 좀 더 세세히 설명해 달라고.

근데 뭐, 잠 푹 잘 수 있고 외롭지 않은, 그런건 꽤 할만 하겠다.”

– 2011년 1월 27일, cyworld @12afterglow.

과거에 쓴 글을 접할 때는 늘 절로 나오는 콧방귀에 ‘또 개소리 했네’ 싶지만, 서른셋의 끝을 바라보는데다 얼마전 정신없이 준비한 결혼식을 치르고 나서 관점이 바뀐 것이지 꼭 쓸데없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아 예전에 생각했던 결혼과 지금 겪고 있는 현실에 대해 비교해보기로 했다.

일단 결혼하면 잠을 푹 잘 수 있다고? 그렇지 않다. 이유는 뭐, 혼자 써오던 침대를 반씩 나눠 쓰는 협소한 공간, 뺏고 뺏기는 이불, 선호하는 방의 온도차이 등이 있겠고. 그리고 무엇보다 며칠전 신사역 뒷골목에서 으르렁 대던 람*르기니를 보며 ‘저런 값비싼 민폐’라고 말한게 무색한 코골이. 그렇다고 누구처럼 지쳐 잠든 남편의 콧구멍을 손가락으로 막을 수는 없겠고. 시끄럽다고 옆구리를 주먹으로 강타할 수도 없겠고. 아직 미운정은 없고, 고운정만 있어서인지 ‘얼마나 피곤하면 저런가’ 싶어 안쓰러움이 크지만 (쓰담쓰담), 어찌됐건 결혼 준비를 시작한 몇 달전부터 지금까지 쭉 극심한 수면부족에 시달린 덕분에 만원 지하철에 낑긴 몸을 맡기고 선채로 잘 수 있는 고단수 뚜벅이가 되었다. 반면 꿈속을 헤메다 드문드문 의식이 들 때 곁에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 안도하곤 한다. 결혼하길 잘했다고 생각이 드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혼자 잠들고 깨는 것에 대한 스무살 그 때의 공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은 참 다행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의 코골이가 자장가가 되주지 않으면 허전해서 잠을 이루지 못 하는 밤도 올테니, 그 또한 다행이다.

외롭지 않다고?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그의 노력 덕택에 어느 정도는 그렇다. 하지만 혼인 및 전입신고를 마치고 나오는 길 나는 그를 만난 후 처음으로 일종의 외로움을 느꼈다. 친정의 일원이 네명이었던 것에 반면, 이제 덩그러니 둘만 있을 단촐한 핵가족. 폐백 때 품은 대추 9개와 밤 3개를 빌미로 9남 3녀는 낳아야 하지 않겠냐고 농담처럼 던졌지만 사실 그 순간 나는 엄마아빠로부터 완전히, 아니 법적으로 분리된 것에 관한 서운함과 만약 그와 헤어진다면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젓갈도 없이, 숟갈도 없이, 혼자가 된다는 막연한 공포심을 느낀 것 같다. 물론 외로움을 느낀 대신 법적 부부가 되었다는 것의 안정감은 결혼전 주기적으로 질풍노도를 겪은 나에게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큰 힘이다. 여담이지만 며칠 전 우연히 발견한 어떤 사실에 관해 혼자 덤덤하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암만 그래봤자 넌 내꺼’라는 법적 족쇄가 한몫했다. 연애중이었다면 홀로 골머리를 앓고 스스로 상처를 들추다 결국 술 먹고 진상 피웠을 법 한 일인데도 말이다.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커지고, 포용할 수 있는 품이 더 넓어진 것 같다. 그게 9남 3녀의 몫이라 할지라도…(ㅋㅋㅋ) 그리고 이런 변화가 내게 생겼다는 것은 참 다행이다.

바래다 주기 귀찮아서 결혼을 했다? 바래다 주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완전 그렇다. 스물여덟에 만난 그는 전라도 광주와 서울 사이의 먼 거리를 거의 매 주말 한달음에 달려오곤 했다. 하지만 서른 넘은 남녀의 연애에는 신천동과 대치동 사이도 힘든 날들이 많았다. 헤어지기 싫어서 통금시간인 12시까지 꼭 붙들고 있고는 싶은데 퇴근 후 10시면 의지와는 다르게 늘어지는 몸, 무거운 눈꺼플, 몽롱해지는 정신. 그 상태로 집에 돌아가는 길이 내게는 여정과 같았다. 아마 글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 또한 집에 바래다 주기 귀찮아져서 나와 결혼을 서둘렀는지도 모른다. 그런거라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한다. 사실 적응이 쉽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12시 즈음이 되면 왠지 엄마가 오는 잠을 깨워가며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아직 내 집이 아닌 것 같은 곳에서 잠옷을 챙겨입고, 세수를 하고, TV를 보다가 소파에서 잠든 그를 들어가서 자자고 깨운다. 이렇게 며칠 지내다 내 짐을 챙겨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지만, 이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그 어떤 곳도 아닌 그의 곁에 꼭 붙어 있는 것이고, 내가 가장 우선시 해야할 역할 또한 그의 평생 조력자가 되는 일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광주와 서울 혹은 잠실과 대치가 아닌 늘 손 닿는 거리에 그가 있고 그 거리가 매일매일 유지 되겠지. 이렇게 더 지내다 보면 서로 부대낄 날도 올거고. 그래도 지금처럼 보고싶어서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빨라지는 그런 마음이 오랜 세월 변하지 않으면 참 다행이겠다.

마지막으로 결혼의 ‘투자가치’에 관하여. 지금껏 만나왔던 사람들의 재력이 천차만별이었던 걸 감안하면 그리 세속적이지도 못했던 것 같지만 글 속에서 ‘세속적인 여자’라고 표현한 걸 보니 어떤 물질적 가치 판단을 해보려 했던 것도 같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몇달 전 결혼을 결심하게 한 그 결정적 계기가 그가 가진 뛰어난 능력이나 잠재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계기를 만든 것은 바로 내 마음가짐이었다. 5년만에 다시 만나는 자리. 그에게 첫 인사를 건내며 내 왼손이 그의 날개뼈 언저리에 선뜻, 그리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얹어지는 걸 보면서 나는 과거에 우리가 헤어졌던 이유나 그 동안 그가 보내온 시간, 그리고 현재 가진 조건이 내게 얼마나 무의미 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나온 진심이 담긴 제스쳐였고 참 예쁜 반가움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게 그렇다. 계산이라는 것을 전부 버리고 나면,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한 사람의 전부를 품을 수 있다.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각박했던 스물 여덟살의 나는 이런 본질에 가깝고 조건이 없는 사랑을 자격이 충만한 그에게 줄 수 없었다. 내 안의 내가 가시처럼 돋아나 스스로를 돌보는 일 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를 놓치고 나는 5년 동안 지나가는 안부도 조심스럽게 물어가며 진심으로 그리고 아주 순수하게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렇지 못 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용기를 냈던 것도 아마 어느 정도 내가 갚아야 할 마음이 있다고 여겨서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결혼의 ‘투자가치’를 지금 묻는다면 사랑을 사랑으로 갚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을 주면 마음이 돌아온다. 나아가 결혼이라는 것을 통하여 가족이 되고,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남동생이 축사에서 언급한 그 ‘조건없는 사랑’을 그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은 내 인생에 가장 빛나는 기회이고, 가장 잘한 선택이고, 또 내가 남길 가장 큰 업적이 되지 않을까. 김세영은 박승환을 오래오래 원 없이 사랑하며 살았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은 내게 참으로 다행인 것이다.

혼자와 함께, 그 큰 차이.

아직도 가끔 꿈에 나오는 유학시절의 잔재가 있다.

해가 떠있을 무렵 깜빡 소파에서 잠들었다 깨고나면 어느덧 밤이었다. 캄캄한 거실벽을 두드리는 화면과 적막 속에 웅성이는 소리. 또 TV를 그대로 켜놓고 잠들었었나보다. ‘밥 먹을 시간이야’ 혹은 ‘들어가서 자’라고 나를 걱정하는 누군가가 깨워서가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 주섬주섬 더듬더듬 방까지 걸어 들어가는 그 고독이 일상일 때. 나 하나 감쪽 같이 사라져도 몇일 간은 아무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그게 얼마나 뼛속까지 휑해지는 일이었는지, 그 절망이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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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 연휴의 마지막 날.

재방송을 보다가 눈꺼플이 무거워져 잠에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해는 어둑어둑 져있고, 또 홀로 떠들고 있는 TV를 보고 있자니 그 때의 그 기억이 너무 생생해졌다. 쿵 하고 마음이 내려앉는 순간. 베고 잠든 것이 평생 나를 돌봐줄 사람의 다리이고, 그 사람도 비슷한 노곤함에 잠에 들어 곁에서 새근새근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던지.

그래, 다시는. 다시는 그런 날이 오지 않아, 나에겐.

엉금엉금 다가가 폭 안겨본다.
잠결에도 더 가까이 나를 당기는 팔.

예전의 나를 아는 누군가가 괜찮냐, 물어본다면
그럼요. 이제 11월도 무섭지 않은걸요. 대답하리라.
그 만큼 괜찮다. 아주 많이 괜찮다.

시작.

어렸을 적 홀로 떠났던 유학의 길이 늘 나 혼자로도 온전해지길 강요했으니, 그저 내 중심적으로 만들어 온 세상에 누군가를 들이고 그 틀을 넓혀간다는 것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상상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우리의 관계는 나의 공간을 마지못해 내줘야 하는 일이 아니라, 어느 날 우연히 걸어 들어간 서로의 세상이 참 자연스럽게도 ‘내 집’이 되는 잔잔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 생긴 확신 하나만으로 목에 핏대를 세워 결혼을 지양했던 지난 날 나의 고집은 아주 빠르고 허무하게 무너졌다. 머쓱하군.

아무쪼록 길었던 나의 방황에 이별을 고하고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 나라는 중심에서 벗어났더니 더 소중한 것들이 내 삶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우리 둘의 세상을 전부 안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넓은 아버님의 품. 사위 손을 잡은 아빠의 손에서 느껴지는 유독 단단한 매듭. 부족한 며느리를 혜량해 주실 어머님의 호탕한 웃음소리. 사위 온다고 종일 콧노래 부르며 요리하다 지워진 엄마의 춤추는 눈썹. 생일마다 뭐 갖고 싶냐는 물음에 “매형 (Hawk brother) 한 마리”라 대답하던 남동생이 아직까지도 느끼지 못하는 그 실감. 그리고 퇴근 길, 저만치에서 마중 나오는 5년 전 그대로의 익숙하고 반가운 얼굴. 달려가서 안겨도 모자랄 것 같다, 그 순간 느끼는 그 사랑을 표현하기엔.

이따금 살면서 살이가 힘들어져도 지금의 소중함을 잊지 않는다면 마음만은 늘 풍요로울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짧고 아쉬운 것인지 함께 알아가겠지. 찬란할 우리의 날들…

시작이다!

내 마음을 여(울리)는 독거노인의 삶.

5월의 끝자락은 참 기억도 하기 싫은데, 희한하게도 6월로 이어지는 나쁜 기억은 다 잊혀졌다. 봉평의 감자밭과 원주 양귀비밭을 엄마와 함께 걸은 맑은 기억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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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장마철이니 빨래를 삶아야 할 것 같아.

커다란 냄비를 사러 마트로 간 그. 돌고 돌다 결국 못 찾고 나온다.

= 세탁기에 ‘삶기모드’ 같은 게 있을거야. 해봐.

답이 한참 없더니, 밤 11시 40분에 빨래를 넣어 돌리고 사진을 찍어 보내준다. 사이클은 무려 두 시간 가까이 남았다. 으이그, 그 시간에 빨래를 돌렸다 언제 자려고.

몇달전 너 시집갈 때 드시려고 할아버지께서 담그신 술이 50년 되는 꼴을 보고 말거냐 는 엄마의 말에 그냥 땅에 묻어! 소리쳤던 나. 결혼에 관한 환상도 없고 오히려 회의적인 입장에 가깝지만, 드문드문 그 가능성에 마음을 여는 순간들이 오기도 한다.

어제처럼 빨래 푹푹 삶는 것 쯤은 내가 해주고 싶을 때. 혹은 밥을 혼자 먹게 하는 마음이 불편할 때. 냉장고 문을 여는데 맥주병이 청아하게 부딫히는 그 텅텅 빈 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릴 때. 틀어놓고 잠든 TV는 내가 꺼주고 싶을 때. 잠결에라도 외롭게 하고 싶지 않을 때.

이렇게 받고 싶은 것 보다 해주고 싶은 게 더 많아질 때 드는 서른셋 낡은이의 결혼 생각. 나도 나를 내려놓을 시기가 오는걸까.

사소한 감동.

그렇게 뿌듯하고 좋을 수가 없다.

벽돌과 벽돌 사이를 단단히 메운 진흙.
외로운 새벽, 문틈새로 새어 나오는 빛.
그런 존재로 산다는 것.

닿지 않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어도
한 켠 나를 놓지 않고 있을 거라는 믿음.
일상 어느 짧은 순간에 잘 끼워진 내가
숨을 쉬며 살아있다는 사소한 감동.

내가 어떤 의미의 사람인가가 궁금하지 않은 것.
전부가 되고자 하는 욕심이 아닌 것.

마즙이 아니라, 마음이 왔다.

집 주소로 사람만한 곰이 배달되던 날,
빈집이라 나중에 직접 가서 곰을 업고 데려왔다.
너 때문에 별 짓을 다하는구나.
너 때문에 내가 못 살겠다.
맥주를 비우며 말했다.

곰을 의자에 앉혀놓고 술을 마시기도 했고,
울다가 같이 누워 잠들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팔이 찢어지고
엉덩이에서 솜이 터져 나왔다.
책상 아래에서 먼지가 쌓였다.
곰은 노환으로 죽었다.

그래도 배달되어져 온 그 날엔,
곰이 아니라, 마음이 왔다.

또 어떤 날은 풀무원에서 전화가 온다.
잦은 건강문제로 아팠다고 한 적이 있었다.
나 마즙 싫어해. 라고 대답할 참이었다.

그런데 배달하는 아주머니가 말한다.
매일 챙겨 드시게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당부를 하셨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 후에는 듣지 못했다.
손이 툭 떨어졌다.

마즙이 아니라, 마음이 왔다.

그러니까 괜찮다.

이별은 다양하다.

몸살전에 오는 두통처럼 조짐이 보이는 이별도 있고, 바람에 쾅! 닫히는 문 처럼 갑작스러운 이별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건 이별은 똑같이 힘들다. 헤어지고 나면 우선 내 편이 사라진 것 같다고 느낀다. 갑자기 화가 나고 갑자기 서글프고 갑자기 우습다. 그러다 보면 이러고 있는 내 자신이 어느 순간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걸 아니까 애인과 헤어진 친구가 부르면 어떡해서든 간다. 떠나간 그를 같이 신랄하게 욕하거나, 함께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해 끌어안고 울지도 않고. 헤어지길 백번 잘했다며 더 좋은 사람 소개시켜 주겠다는 헛된 희망도 전하지 않는다. 그저 다른 친구들과 술을 먹고 헤어진 자리에 찾아가 고추장에 빠져 있는 휴대폰을 꺼내 닦아주고, 취해서 헛소리 하는 옆에서 오징어를 오물오물 씹으며 야구 하이라이트를 보다가, 깼다 싶으면 택시를 불러 집에 보낸다. 이 정도면 별로 큰 폐는 아니라고 느껴질 만큼만 돌본다. 나에게까지 미안하지 말라고. 그렇지 않아도 그에게 못 해준 것만 떠올라 미안함으로 가슴을 치고 있을테니까.

온다고 하면 오라고 한다. 머리도 제대로 안 말리고 며칠 굶은 사람처럼 와서, 한 쪽 구석에 앉아 울다가 웃었다가 화를 냈다가 하는 모습을 적당히 모른 척 둔다. 나는 옆에서 타자소리가 끊이지 않게 글을 쓰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로 드라마 한 편을 틀어놓고 본다. 부르면 잠시 눈길을 그 쪽으로 돌렸다가, 원망이든 슬픔이든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다시 하던 일을 한다.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인기척 하나만으로 마음이 조금 편해지기도 하니까. 말을 하기 보다는 주로 듣는 쪽이지만 이야기를 하는 동안은 몸 어딘가가 닿게 앉는다. 헤어지고 나면 만지고 만져지던 기억도 그리워 온몸이 휑뎅그렁하게 느껴질 때 손가락이나 무릎이 닿는 촉감은 꼭 그의 것이 아니어도 위로가 되곤 한다.

결혼과 출산 소식을 더 자주 듣게 되는 나이. 그런데 5월, 연이은 이별 소식을 접한다. 밤에 운전하는 일이 많아졌고 문닫기 직전의 카페에 앉아 있는 일도 늘었다. 모두 살면서 이별을 하고, 헤어지고 나면 누구나 힘들기 마련. 늘 웃으며 돌아서는 나에게 또한 이별은 그렇게 무섭다. 그의 냄새, 말투, 웃음소리, 하찮은 발걸음까지도 그리워 시도때도 없이 울컥한다. 껌종이 뒤에 그가 써놓은 중국집 전화번호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끝내 같이 보지 못한 영화 포스터를 올려다보며 강남역 한복판에서 호떡을 든채로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한다. 다 안다. 다 겪었으니까. 그러나 헤어진 후의 친구들에게 정작 하고 싶은 위로의 말은 이게 아니다.

헤어진 건 헤어질 수 있어서다. 헤어질 수 있을 만큼만 사랑한 거고, 그러니까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