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 Tyler Knott Gregson

I want to be the sound, that sound I am sure every person on every planet makes but no one will ever make quite like you, when you stretch your body as far as it will stretch in the morning. That soft mix of moan and squeal as you bend the sleep from your weary bones and remind them that they were built for being vertical no matter how much they love the feeling of lying down.

I wonder how it’d feel to be your favorite song. The one that makes you stand to look for the hand that can only land on the small of your back and spin you in slow circles to the words you know by heart. I want to be known by heart like all the songs that act as soundtrack to all the memories of all the things you’ve ever done.

I want to be your dreams, be they nighttime dreams that take you to places that you have never been or put air between your feet and the earth that you’re locked to or just simply let you sit around a table that you and I built out of old wood we found on slow walks through rainy fields.

– Tyler Knott Greg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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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t Check.

국방백서는 2004년부터 주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국방부 관계자는 ‘주적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북한 정권을 적으로 규정한 것만으로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표현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가장 최근에 발간한 국방백서 제2절 1항 국방목표에는 북한이 아닌 ‘북한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북한 주민과 명백히 분리한 것이다.

사실 적이든 주적이든 말장난일 뿐이고, 중요한 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는 것이다.

어느 기사의 덧글이 와닿아서:

입대 전 신체검사를 받으면서도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다’라는 말이다. 훈련소에서도 정신교육시간에도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다.’ 이런 교육이 극우의 시작이며 악의 평범성을 자아낸다. 나치의 주적은 유대인이었고 그들은 수 없이 학살당했다. 우리는 그런 나치가 나쁘다고 배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전체주의적 사고를 세뇌당한다. 과연 이 것이 바람직 한가.

관찰하다.

고등학교 내내 한 명의 남자친구. 꽤 긴 시간 그를 보며 지냈다. 어느 날 기숙사 창문으로 내다본 저 아래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남학생들이 점처럼 작게 보였였다. 그 중에 내 남자친구가 누구인지 한 번에 알아보는 신공이 생겼다. 내가 그를 오래 관찰해 왔기 때문일 거다.

효림언니가 흰콩이를 낳았을 때 조리원을 방문한 나는, 늘 뱃속에서만 내 목소리를 들었을 흰콩이와의 첫 대면이 경이로워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순간 눈물이 왈칵했던 이유는 고작 한 시간만 이렇게 바라봐도 눈이며 코며 입이며 이마까지도 눈에 익숙해지는데,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를 한 달을 몇 년을 바라보는 내 아이는 대체 어떤 존재일까, 하는 애잔함 때문이었다. 그렇게 관찰이라는 게 무섭고도 중요한 것이리라.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첫 번째는 관찰이다. 일상을 관찰하고 발견하는 것. 그 것이 인사이트와 연결된다. 그래서일까, 힐러리 교수는 내 글에 막힘이 느껴질 때마다 오늘은 수업에 오지 말고 카페에 앉아서 하루 종일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라고 풀어주었다. 그 때 지켜봤던 몇 명의 특이한, 혹은 유난히 마음에 와닿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얼굴이며 표정이며 섬세한 손짓까지 기억이 난다. 자욱한 세월만큼이나 낡은 책 속, 여사님 사진을 책갈피로 쓰고 계신 할아버지라던지. 나 처럼 몇 시간 동안 깜빡이는 커서만 들여다보고 있던 고뇌의 글쟁이라던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작은 행동, 소소한 습관들.

비록 좋은 글을 쓰고 있지는 못하지만 내가 가장 열심히 관찰하는 것은 나 스스로다. 지금 내 감정의 기복들, 우울이 어느 지점에 와있는지, 하루에 몇 보를 걸었는지, 최근 밥과 면의 비율이 어느 정돈지, 알러지는 어떤 이유로 발병하는지, 타인에 대한 내 잣대가 어디쯤인지,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지, 미움은 또 어디에 두었는지. 매일 관찰하고 살핀다. 그래서 나에 대한 글은 잘 쓸 수 있다.

작년 혼인신고를 하면서 그의 이름을 한자로 그려적고, 생년월일을 쓰고, 마음이 뭉클해졌었다. 이제 나 말고도 박승환이라는 사람을 관찰하게 되었구나. 늘 소파에서 잠들고, 뭔가에 집중 했을 때의 표정, 유난히 즐겨입는 옷, 싫어하는 사람, 몸 어디에 점이 있는지, 상처가 있는지, 어디가 아픈지, 또 어디가 예쁜지.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관찰하다 보면 그에 대한 글도 잘 쓸 수 있겠지.

귀 뒤로 이어지는 목선을 엄지로 어루만지며 이렇게나 가까워진 그와 내가 놀랍다. ‘여길 이렇게 쓰다듬을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세상 나 하나 뿐이겠지.’ 유독 특별한 이 특별함. 무엇보다 내가 전혀 모르고 살 수도 있었을 이 감정들을 겪고 느낄 수 있게 되어 고맙다. 나날이 겸손해지며 사소한 것에도 무척이나 감사하다. 매일 매일 본질에 가까운 사랑을 알아가며, 이제서야. 정말 지금에서야, 비로소 행복한가, 싶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는 중이라면 이 행복이 당신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