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결국 사랑을 사랑하는 일.

‘건축학개론’을 본 친구들 대부분은 어떤 감정의 동요 때문에 극장에 갔다고 고백했다. 한 친구는 “김동률의 가공할 저음을 듣자마자 울 뻔했잖아!” 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람회 이야기를 하던 친구의 목소리에는 지나간 시절에 대한 아련함이 묻어있었다. 그의 첫사랑이었던 연상의 여자는 이제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을 법한 나이이기도 하다. 우리도 그렇다. 서른. 이 나이쯤 되면 누군가를 향해 심장이 뛰는 설렘이란 감정이 얼마나 희귀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사랑이란 또 오게 마련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잃어버린 사랑이 앞으로 올 사랑과 절대 같을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힘들다. 그 것이 온전한 사랑일 때는 더 그렇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랑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종종 더 많이 본다. 어쩌면 나 또한 그러할 지도 모르겠다. 연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간단치 않다. 사랑이 힘든 이유는 사랑만이 과거에 상처받았던 어린 나의 모습을 투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남자와 여자가 어느 정도 아이처럼 유치해질 수 있는지를 상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중학교 때부터 유학생활을 하면서 엄마의 사랑을 맘껏 받지 못하고 혼자 자란 어린 내가 그의 귓불을 잡아당기며 말한다. “나 예뻐?” 그럼 그가 나를 향해 웃으며 말한다. “넌 세상에서 가장 에뻐. 무슨 짓을 해도 사랑스러워! 코를 파도 예쁘고, 침을 흘려도 예쁘고, 음식을 묻혀도 예뻐!” 이 같은 유치 찬란한 말과 행동이 서른이 넘은 남자와 여자에게서 이따금 나온다는 게 말이다. 이렇듯 결핍됐던 그 시절의 내가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상처는 조금씩 치유된다. 이렇게 우리는 사랑으로 온전해진다.

바람이 부는 건 머리카락을 날리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구름이 존재하는 건 하늘의 높이를 가늠하기 위해서이고, 새를 심심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다. 어린 시절 나는 이런 식으로 세상의 사물들을 규정하고 관계 짓는 놀이를 혼자 하곤 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사랑을 하는 건 아프기 위해서다. 손가락을 베었을 때, 뜨거운 것에 팔꿈치를 데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손가락과 팔꿈치가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랑은 뜨거운 무엇인가에 온몸을 데는 것이다. 사랑만이 우리에게 심장과 늑골과 뇌가 있다는 걸 깨닫게 한다. 그래서 이토록 심장이 뛰도록 가슴 설레고, 늑골이 시리도록 가슴 아프며, 머리가 깨지도록 복잡해 지는 것이다. 하지만 아프다는 건 인간이 살이 있다는 분명한 증거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면 어른으로 성장하는 건 그런 이유이다.

‘건축학개론’을 친구와 논하고 한 껏 심란해진 나는 버스를 탔다. 그 버스가 정릉으로 가는 버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첫사랑을 떠올리는 마음은 과거의 어느 곳까지 흘러가고 있었다. 어린 내가 그 기억 속에서 웃고 있었다. 추억을 추억하는 일. 슬픔을 슬퍼하는 일. 무엇보다 기쁨을 기뻐하는 일 모두가 결국 ‘사랑을 사랑하는 일’ 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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